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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일본/홋카이도

아이누 족 이들을 아십니까!

일본은 크게 4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쿄, 오오사카 등이 속해 있는 일본의 중심 혼슈,

부산에서 가까운 남서쪽 섬 큐슈,

우동과 순례길로 유명한 시코쿠,

그리고, 가장 북쪽에 위치한 섬 홋카이도.

 

 

JR北海道の特急おおぞら

 

 

     이 땅은 독특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50여 년 전 이곳은 지금의 일본이 아니라 아이누 민족의 땅, 아이누 말로

'야움모시리 땅의 세계'였다. 아이누는 일본 혼슈에 사는 일본인과는 다른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가진 민족이다. 이들은 야움모시리를 비롯해 러시아의 사할린이나 쿠릴열도 등 북방지역에 흩어져 살며 주로 수렵과 어업으로 생활을 영위해 걌다.

자연과의 섭생과 조화를 중요시했으며 신과 함께 살아간다는 독특한 종교관도 가지고 있었다. 척박한 땅에서 혹독한 계절에 적응하며 살아야 했던 이들에겐 자연에 대한 순응은 어쩌면 당연히 견지해야 할 태도였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신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때로는 사물로 때로는 자연현상으로 인간 세상에 내려와 인간과 함께 지낸다고 믿었다. 그리고 목적을 다한 후에는 본래 자신들의 세상으로 돌아간다고 여겼다. 그래서 아이누 문화에서 신을 본래의 세상으로 돌려보내는 의식은 지금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아이누는 고유한 복식문화도 가지고 있었다. 주로 나무의 속껍질이나 동물의 가죽 따위를 소재로 옷을 지어 입었는데, 옷에는 독특한 ㅇ문양을 새겨 넣었다, 북방지역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살았던 아이누들은 옷의 문양으로 서로가 속한 지역을 알 수 있었다. 옷의 문양은 아이누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도구였던 셈이다. 한편, 옷의 깃이나 소매에 새겨진 문양에는 악귀를 쫒는 특수한 목적도 있었다.

     이들에게는 독창적인 언어도 존재했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기록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다소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아이누는 주로 구전으로 문화를 전승하는 원시적인 방법을 고수해 왔다. 이웃나라인 러시아, 조선, 일본, 중국 등이 문자를 사용한 기록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앞으로 닥칠 시대의 변화를 예감하지 못한 탓이리라. 야움모시리는 19세기에 일본에 강제 병합되었고, 그들은 비로소 말을 통해 문화를 전하기 어려워졌음을 깨달았다.

 

アイヌの人々は、北海道を中心に、13~14世紀に独自の文化を形成した。狩猟や漁労などを生業とし、日本語とは全く異なるアイヌ語を話してきた。

 明治以降、アイヌ語の使用の制限といった同化政策を強いられたが、今も自らをアイヌと認識する人は少なくない。

아이누 사람들은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13~14세기에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다. 수렵과 어로 등을 생업을 하면서, 일본어와는 전혀 다른 아이누 언어를 사용해 왔다.

메이지유신 이후, 아이누 언어를  사용 제한한다는 동화정책을 강요당했지만, 지금도 스스로 아이누라고 인식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

 

 

 

アイヌ民族の伝統的衣装

 

     아이누 인들은 오래전부터 일본인과 교역했다. 대상물품은 주로 그들이 사냥한 해산물이나 러시아 등을 통해 들어온 중국 물자 등이었다. 일본 혼슈에서는 야움모시리를 '에조치'라고 불렀고 아이누들도 혼슈 사람을 '시삼'이라며 자신들과 구별했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야움모시리의 병합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8~19세기경이다.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놓인 야움모시리를 비롯한 쿠릴열도는 두 국가의 영역 다툼에서 희생양이 되었다.  18세기 말 러시아의배가 야움모시리의 북쪽으로 내항했고 깜짝 놀란 일본은 서둘러 조사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이곳을 일본의 영토로 못 박기위해 목조 기둥을 세웠다. 이후 메이지 정권(1868~1912)이 들어섰다. 이들은 아이누를 무시한 채 야움모시리를 '주인 없는 땅'으로 규정하고 '홋카이도'라는 새로운 명칭을 부여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아이누들의 생활양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이누는 많더라도 한 마을에 10가구 정도만 모여사는 원시적인 주거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을의 구성원은 일족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말하자면 18세기에도 아이누는 국가가 아닌 촌락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게다가 자연에 순응하는 민족성 때문에 땅을 개인이  소유한다는 개념도 없었다. 그러니 하루아침에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일본인에게 대항할 전략적이고 체계적인 그 무엇도 없었다.

 

     근대화라는 과제에 직면해 있던 메이지 정부는 천연자원의 보고인 야움모시리에 개척사를 설치한 후 혼슈에 사는 일본인을 대거 삿포로와 그 인근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이들에게는 토지와 집 등이 제공되었고, 개척한 토지는 개인 소유가 되기도 했다. 개척이 안정기에 들어서면서 자유의지에 따라 수만 명의 사람들이 홋카이도로 들어왔다. 그들은 땅을 일구고 농업 등을 발달시켜 나갔으며 이를 근간으로 홋카이도에는 현재의 대단위 농업지대가 만들어졌다.

 

     자신들의 땅을 빼앗긴 아이누들은 오랜 세월 이어져 오던 문화와 전통을 억압당했고 노동력도 착취당했다. 메이지 정부는 동화정책이라는 미명 하에  그들의 생활 습관마저 바꿔놓으려 했다. 수렵과 어업은 금지당했고, 두발이나 장식물, 전통화장도 혼슈의 사람처럼 바꿔야만 했다. 언어도 사용할 수 없었고 이름은 일본식으로 개명해야 했다.

1871년 아이누들은 일본 국민으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호적에는 '구토인'이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말과 생활습관이 다른 아이누들은 사회 곳곳에서 차별받았고, 급기야 기아, 병, 가난에 허덕이다 죽어 가는 이들도 생겼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차별을 피해 아이누임을 숨기는 사람이 생기면서 아이누의 인구는 크게 감소했다.

 

 

「Boys be ambitious!」で有名なクラーク博士の胸像は、人気の記念撮影スポット「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그 유명한 클라크 박사의 흉상, 이곳은 기념사진촬영장소로도 유명하다.

 

 

     아이누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관심을 가진 데는 학교 교육은 물론 기독교의 영향도 크다. 특히 영국의 선교사 존 바첼로(1854~1944)는 아이누를 대상으로 기관지를 만들고 기독교 사관을 통해 이들을 계몽하는 한편, 로마자를 이용해 아이누어를 쓸 수 있도록 교육했다. 부당한 차별 속에서 자신들에게 손을 내밀어 준 파란 눈의 외국인 선교사는 그들에게 또 하나의 신이 아니었을까. 그가 전하는 기독교 사관은 한줄기 빛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 기독교는 혼슈에서 온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홋카이도의 삶이 그리 녹록치는 않았다. 비록 토지와 집은 받았지만 척박한 땅을 일구고 개간해서 키워내는 것은 이제 막 근대화 길로 접어든 일본인에게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이 시기 홋카이도에는 지금의 홋카이도대학의 전신이 삿포로 농학교가 설립 · 운영되었다. 초대 교장은 서양인인 윌리엄 스미스클라크(1826~1886)박사였다. 우리에게도 'Boys be ambitious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말로 유명하다. 

클라크 박사의 영향력 때문인지 도시 곳곳에서는 심심치 않게 교회의 십자가를 볼 수 있다.

일본 혼슈에선 거의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전통적으로 신도와 불교를 신봉하는 혼슈에서 신사나 절을 만나는 게  일반적인데, 홋카이도에서는 상대적으로 절이나 신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 아이누는 일본 곳곳에 약 2만여 명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랫동안 일본인에게 핍박받아 온 탓에 여전히 자신이 아이누의 후손임을 숨긴 채 살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홋카이도 전역에는 크고 작은 아이누 박물관과 전통마을이 있다. '아칸'에는 실제로 아이누들이 거주하는 마을이 있다.

최근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국립아이누민속박물관 '우포포이'가 문을 열었다.

아이누 문화가 되살아 나는 사회 분위기이다.

그들, 아이누人들의 가치가 빛나고 있는 푸른 땅 홋카이도!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요!

홋카이도! 그 땅을 밟을 때

아이누인들!

당신들의 노고,

땅에 떨어진 눈물을 새겨보겠습니다.

그래서 홋카이도는

아름다운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자연에 순응했던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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