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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일본

'오차'라는 차 문화

일본인의 생활에서 '오차(お茶)라고 하는'차' 마시는 일은 기본적인 것이다. 손님이 찾아오면, 손님에게 묻지도 않고 우선 찻잎에다 뜨거운 물을 부어서 대접한다. 그에 비해 우리는 "커피 하시겠습니까?" 또는 "무얼 드시겠습니까?" 등의 권유의 말은 사용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손님은 의례 방문한 곳(가정, 사무식 등)에서 차를 갖다주면 '고맙습니다'하고 조용히 마시면 그뿐이다. 일본인들은 가정에서 항상 차를 마신다. 특히 겨울철에는 #보온 효과도 있고, 가족끼리 대화하는 사이에도 찻잔을 서로의 사이에다 놓아두는 격이다.

일본에는 한국 불교의 포교 과정에서 차가 건너 갔다. 그 점에 관해서는 일본 학자들도 진솔하게 밝히고들 있다.

이를테면 마쯔시타 사토루(まつしたさとる)교수는 그의 연구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으로부터 일본에 차가 건너 온 것은 벼의 전래와 불교의 전래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조선 역사상 차가 처음 등장한 것은 신라 선덕여왕(632~647 재위) 시대이다. 조선에서는 고려 시대에 불교에 의해 차 문화가 크게 발전했다.」 (「차의 기원과 전래」1973)

 

일본 최초로 차를 마신 9세기 초 사가천황

일본의 역사 책에서 차에 관한 기록은 사가천황(809~823 재위) 시대에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 역사책 『류이쥬국사』(서기 822년 편찬)에 보면, 일본의 사가천황이 신라인 영충(永忠) 큰스님에게 몸소 찾아가서 차를 대접받았다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왔다.

「사가천황은 오우미 땅의 카라사키에 거동하여 그곳 스후쿠지 절에 찾아갔을 때, 대승 영충 스님이 사가쳔황에게 차를 다려 주었다.」

이 기록은 일본 역사 최초의'차'에 관한 기사이다. 영충 대승은 신라에서 왜나라에 건너가서 카라사키からさき의 '스후쿠지' 사찰에서 불교를 펴고 있던 고승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신라는 왜나라에 불교 포교와 더불어 차 문화도 전파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살피게 해 준다.

격식을 갖춘 '차시쯔'茶室 라는#'다실'

일본의 주택에는 '차노마'茶の間라는 방이 있다. 일종의 거실과 식사실을 겸하는 방이다.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며 가족이 단란하게 지내는 곳이다.

또한 격식을 갖춘 가정에서는 이른바 '차시쯔'라고 부르는 '다실'로써 특별히 꾸며진 방이 있다.

자그마하게 독립된 건물 그 자체를 차실로 세우기도 한다.

일반적인 다실은 #'타타미'畳 넷 반 크기의 비교적으로 작은방이다.

이런 다실은 작은 칸이라는 뜻에서 #'코마'小間こま라고 부른다.

그것과 상대적으로 독립된 큰 규모의 다실은 #'히로마'広間ひろま라고 부르는 일종의 서원식인 곳도 있다.

차의 명인 '센노리큐'千利休せんのりきゅう 의 초막 '미요우키안'

다실은 반드시 커서 좋고 자랑스러운 것 만은 아니다.

일본의 차의 명인이라는 센노리큐(1522~1591)의 경우 그가 차를 즐긴 다실은 불과 타타미 두 장 크기의 방이다.

지금도 일본 교토京都의 다실의 명소로서 소중하게 보존되어 오고 있는 #'미요우키안'이라고 하는 자그만 초가 암자이다.

다실에는 가구 따위는 일체 놓지 않으며, 다만 다실 한구석으로 타타미 반 크기의 #운두가 약간 높은 곳에, 한 송이의 꽃병을 놓고, 그 벽에는 족자掛け軸를 걸어 놓아, 그 집 주인의 서화의 풍취를 보여준다. 다희의 손님들을 주욱 앉히는 맞은편의 주인이 앉는 타타미 앞은 차를 다리는 장소가 된다.

#'스미로'すみろ라고 해서 타타미 바닥이 소형으로 네모나게 움푹 들어간 장소가 있다. 이곳에서는 소형 숯불 화로인 #'후로'를 놓고, 차를 다릴 물을 끓이게 된다. 주인은 손님에게 한 사람씩 차례로 일일이 '차완'茶わん이라는 큼직한 도기의 찻종에다 분말 녹차인 말차(抹茶、ひきちゃ)를 찻물로 개어서 대접하게 된다.

일본에서 으뜸으로 꼽는 다완은 고려자기이다. 카토우 요시이치로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조선의 다완은 다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만약 조선의 다완이 없었다고 한다면, 과연 오늘과 같은 다도가 생겼을는지 알 수 없으며, 일본의 다완 역시 생겨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며, 이른바 다완의 본종이므로 이것은 당연히 다른 다완과는 뚜렷이 구분을 해서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완강좌」 ③『일본미술공예』 1951.5)

          일본 쇼우군에서 사용했던 「고려 둥근 찻잔」 국보급이다

고려 다완이 일본 최고 보물

일본의 차의 명인 센노리큐가 애용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고려 다완이다. 센노리큐의 소장품으로 알려진 명품은 '리큐우 토토야' '코우라이 시오케' 등이 유명하다. 코우라이 시오케는 에도 막부의 제2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쯔徳川家光(1604~1651)가 센노 리큐 사후에 보존하던 것을 다이묘였던 마에다 토시쯔네前田利恒(1593~1658)가 물려받아 가보로 후손에 전수되어 온 보물이라고 한다.

다인 센노리큐가 애용했다는 고려자기 다완 '리큐우 토토야'로 이름난 보물

 

에도시대 토쿠가와 가문 제2대 쇼우군이 애용했다는 고려자기 '코우라이 시오케'

손님들을 차실에 들어오면, 무릎을 꿇고 앉아야 한다. 일본인들은 이렇게 앉는 것을 가리켜 '세이자'正座 즉, '정좌'라고 말한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무릎을 꿇는 정좌를 해 온 일본 사람들은 누구나 잘 앉는다.

다실은 일반적으로 그 규격이 겨우 타타미 4장 반이다. 그러기에 이런 좁은 곳에 여러 손님이 몰려 앉게 되면, 책상다리는커녕 무릎 꿇는 일본식 정좌에도 다실은 그만 빼곡한 포화 상태가 된다.

교토대학 경제학박사인 요시다 마사아키 교수는 다실에서의 정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무릎 꿇는 정좌는 다실이 좁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불과 타타미 4장 반의 크기의 다실에 10명씩 앉는 경우 책상다리로서는 모두 앉을 수 없습니다. 이 다도에서의 정좌는 금세 일어서기 힘들다는 데서 공격적입니다. 즉, 평화적인 자세라는 데서 일종의 예법이 되었습니다. 다도를 배우게 된 무사들도 정좌를 하면서 그것이 일상생활에도 침투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왕족이며 귀족이나, 신사의 신관과 사찰의 승려들은 무릎을 꿇지 않고 책상다리를 했다고 합니다."

일본 역사물 연극, 영화 장면을 보더라도 귀족과 무사며 조정의 조신들은 항상 책상다리로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학생일 때 일본 문화체험이 있어서 참여했다가

당연히 차 문화체험이 있어서 다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너무 좁고 무릎을 꿇고 앉았기에 다리에 쥐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고통에 가까운 체험을 했다.ㅎㅎㅎ

차 한잔 마시는 게 이렇게나 힘이 드냐!!! 고

젊은 우리들은 서로 서로 눈치를 보며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차 맛도 물론 몰랐었다. 그저 빨리 일어나고 싶은 마음뿐!

세월이 흘러 지금은 오차를 너무 좋아한다.

일본을 가면 오차를 꼭 사 온다. 그것도 제일 좋은 걸로...

다기도 예쁜 것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사 오게 된다.

하루에 차 마시는 시간을 만들고 있다.

스스로에게 좀 쉬어가는 시간을 가지려고...

아직 여름입니다.

차 한잔하시면서 남은 오후도 잘 마무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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